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로네시 전투 (문단 편집) === 클라우제비츠 작전 === 4기갑군 우익의 6군은 30일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벨고르드 남동쪽의 소련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7월 5일까지도 이곳에서의 공세가 독일군의 주력이라고 확신하지 못했고 여전히 많은 예비대가 모스크바 근처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타브카는 포위를 피하기 위해 6일부터 남서 전선군과 남부 전선군에 전면적인 후퇴를 명령했다. 독일군은 보급 문제가 심각했다. 최우선적으로 연료가 보급되는 기갑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1기갑군은 16일에 편제의 30%정도의 전력만 보유중이었다. 기갑사단들의 전차 전력은 1개 전차대대 수준이었다. 히틀러의 명에 따라, 40기갑군단은 다시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https://en.wikipedia.org/wiki/Rossosh,_Rossoshansky_District,_Voronezh_Oblast|로소쉬]]에 있던 티모셴코의 남서 전선군 사령부는 독일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6군의 기동 전력만으로는 적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6군은 적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고 히틀러는 7월 17일, 4기갑군을 A 집단군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켜버렸다.[* 히틀러는 13일에 처음으로 로스토프에 기갑 전력을 집중하겠다고 선언했고 할더가 강력히 반대했으나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 결과, 안 그래도 위태롭던 보급라인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칼라치 전투]]에서 독일군은 2주 넘게 멈춰있어야 했다. 그래도 그 전까지 진격은 이어졌고 14일에 [[루한스크|보로실로프그라드]]를 점령하고 23일에는 [[로스토프나도누|로스토프]]에 도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